동성왕의 강력한 중앙집권화의 추진에 따라 재지세력의 중앙으로의 흡수도 촉진되었다. 웅진도읍 초기 금강유역 신흥 토착세력의 괄목할만한 중앙정치 무대로의 진출은 일찍부터 주목된 바 있다. 다양한 족적 배경과 기반을 지닌 신흥토착세력의 중앙진출은 왕도의 편제를 생각하게 한다. 왕도의 편제는 곧 웅진성의 5부제 시행을 뜻한다. 종래, 웅진도읍기의 5부제 시행에 관해서는 계획에 그쳤다는 견해와 실시되었다는 견해가 양립된 바 있다. 그런데 웅진도읍기의 5부제 시행을 동성왕대의 지방지배의 완결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부명(部名)의 존재가 눈길을 끈다.
<일본서기>계체 10년(516)과 안한(安閒) 원년(534)에 왜에 파견된 백제 사신 중 전부(前部)·상부(上部)·하부(下部) 등과 같은 출신 부명(部名)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공주에서 출토된 부명와(部名瓦) 역시 웅진 왕도의 5부제 시행을 나타내주는 증거가 된다. 그 밖에, 사비천도 직전에 백제가 가야의 대신라접경 지역에 군령(郡令)과 성주를 두어 직접 통치하고 있는 사실에서 방(方)-군(郡)-성(城)으로 체계화된 백제 지방제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같은 방-군-성제는 담로제의 뒤를 이어 중앙의 통치력이 크게 신장된 이후에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웅진도읍 후기에는 왕도뿐만 아니라, 전국에 대한 정연한 행정지배가 이루어졌음을 시사해준다. 그렇다면, 왕도의 편제 방식인 5부제는 5방제가 실시되기 훨씬 이전에 시행되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이러한 추정을 확실히 해주는 근거는 동성왕대 중엽에 축조되었다는 웅진나성의 존재이다. 웅진나성은 공산성을 기준으로 할 때, 그 동편으로는 옥룡동의 보조산성을 지나 남쪽으로 꺾어져 내려와 중학동에서 남산으로 왔다가 서쪽으로 꺾어져서 현재 공주고등학교 교정 남측을 가로 질러서 일락산과 연결되고 있다. 여기서 북으로 올라가 봉황산 좌측을 지나 교촌봉 밑으로 해서 금성동 언덕 위에 소재한 서편 보조산성을 지나 금강교 부근에 이르는 구획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나성의 흔적은 확인된 바 없으므로, 나성 축조설은 근거를 잃고 있다. 도시 구간과 관련한 나성의 존재는 생각해 볼만 하다.
도시 계획으로서 왕도의 편제와 관련한 웅진나성의 축조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생전의 업적 내지는 장지처(葬地處)와 관련 있을 24대 모대왕(牟大王)의 시호이다. 사비천도 이후 모대왕에게 추존된 ‘동성’이라는 시호는 그 재위 시의 빈번한 축성기록을 생각할 때 웅진나성의 축조와 관련있지 않을까 한다. 사비도읍기 당시 옛 도읍인 웅진성을 동성(東城)이라 한 반면, 현행 왕도인 사비성을 서성(西城)이라고 했다 한다. 물론 웅진성은 엄밀히 따져 사비성을 기준해서 동북쪽에 해당된다. 그렇지만 고려시대에 개성의 서북쪽에 해당되는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하였고, 그 동남쪽의 경주를 동경(東京)이라 한 사실에 비추어 불 때 엄격한 방위 기준에 입각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생전의 업적과 관련된 동성이라는 시호나 웅진나성의 축조시기를 고려할 때 동성왕대 왕도의 편제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크다. 더구나 웅진성 주위 10km 반경내에 13개의 산성이 배치된 점은 동성왕대의 빈번한 축성 기록과 관련시켜 볼 때, 왕도를 중심한 새로운 방위망이 구축되었음을 시사해준다. 모두 웅진도읍기의 조영으로 간주할 수는 없지만, 웅진나성 주변의 웅진동·송산리·옥룡동·보통동·금학동·시목중·중학동 등지 고분군의 분포가 사비나성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도 함께 지적할 수 있다. 웅진나성을 둘러싼 고분군의 분포는 곧 왕도 내에 여러 단위 지배세력이 결집되었음을 가리켜준다. 이는 곧 동성왕대 왕도의 편제와 짝하는 현상이다.
이와 관련해, 웅진성에서는 웅진교라는 교량이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그 위치는 현재 공주시를 남북으로 가르면서 금강으로 유입되는 제민천에 가설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제민천에 교량이 설치되지 않는다면 공주 관내의 동서 교통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여 원활한 도시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때문에 도시 기능의 서쪽으로의 공간 확대를 위해서 나왔다고 한다. 그렇지만 고구려 평양성에서도 대동강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목교 유구가 확인된 것을 볼 때, 웅진교는 금강의 남북을 연결하는 거대한 다리였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신구세력 조정을 통해 중앙권력구조가 안정됨에 따라 동성왕은 정정의 혼미를 틈타 이탈한 지방세력에 시야를 돌려 수습할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럼에 따라, 문란된 지배질서를 재정비하고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방안이 모색되었다. 이러한 모색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강화를 의미하는 동시에 지배기반의 확대를 통한 왕권의 신장이라는 측면과도 밀접히 관계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 490년(동성왕 12)의 남제로부터의 책봉 사실이 유의된다. 그 내용인 즉 충성과 공로를 다해 국난을 제거해서 사직을 견고하게 지킨데 대한 논공적 성역이 짙게 깔려 있다
왕족 중심의 제수를 요청한 배경은 개별적인 논공 부분에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들 귀족에 대한 수작 요청에는 무공(武功)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국정의 보좌 내지는 시무 충실이라는 내치(內治)로 귀일되고 있다. 이로 볼 때, 왕권의 강화와 관련짓는 것이 무리가 없다.
그러면 동성왕이 이들 제수 귀족의 보필을 받아 국난을 제거하고 사직을 견고하게 번성시킬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제수 요청 관작을 보면, 지명에 왕 혹은 후를 붙인 것이 보이고 있는 만큼, 왕의 자제와 종족을 전국의 대성(大城)에 분거(分居)시킨 담로제도의 일면으로 간주된다. 물론 담로제의 편린은 이미 개로왕대에 엿보이고 있어 동성왕대에 처음 실시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담로제 시행의 흔적이 뚜렷이 보이고있는 점이 주목된다고 할 것이다.
정연한 지방지배 방식인 오방제(五方制) 시행 이전 단계인 담로제가 동성왕대에 접어들어서 갑자기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 배경은 고구려에 의한 대중(對中) 교통로의 차단과 그로 말미암은 제해권(制海權)의 동요, 영토의 상실로 인한 인적 물적 자원의 손실, 국민의 사기 저하 등이 상승 작용하여 왕권의 약화를 초래하고 지배세력의 동요와 반란을 야기시키는 중앙 정치의 거듭된 혼미에 따른 힘의 공백을 틈타 지방세력에 있어서도 변화가 초래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중앙권력의 지방 통제력 이완에 편승한 지방세력의 이탈과 동요가 잇따랐음은 상상할 수 있다. 이는 백제가 일찍이 진출했던 대중국 상업무역권의 동요라든지 가야연맹이나 탐라와 같은 백제영역 바깥 세력의 이탈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닌, 국내 재지 세력의 이탈이 속출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러한 지방세력의 분립화 경향이 백제 왕권이 직면한 과제이기도 했다.
왕도인 웅진성과 지리적으로 원격한 관계로 중앙 정치권력의 파장이 미치지 못한 지역에서는 토착세력의 동요와 이탈이 급증했다. 남제로부터 제수받은 고위 귀족들이 영산강 유역을 비롯한 백제 남단의 전라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대거 분봉되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 있다.
영산강 유역의 토착세력 집단은 백제왕실의 남천 이전인 선사시대 이래로 꾸준히 성장해 왔었다. 이처럼 선사시대 이래로 정치·문화적으로 강인한 기반을 유지하고 있던 영산강 유역 세력이 중앙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갑작스런 힘의 진공상태를 틈타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높다 하겠다.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에서 금동관과 용봉문 환두대도를 착용할 정도의 토호세력이 출현하게 된 것도 이 시기의 분위기를 잘 반영해 준다. 금동관과 용문봉 환두대도를 착용할 정도의 수장이 묻힌 신촌리 9호분은 한 변이 33m이고, 높이가 6m에 달하는 거대분(巨大墳)일 뿐만 아니라, 이 분묘의 봉토 축조에만 2,400명 이상의 연인원이 필요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피장자의 지배력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더욱이 9호분의 봉토 축조 연인원수는 신라 왕릉으로 추정되는 천마총의 절반에 해당된다. 이처럼 영산강 유역에 강대한 지배력을 갖춘 수장이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백제 중앙 정치의 혼미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중앙 정치의 혼란이 수습되고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된 동성왕대에 접어들자 중앙권력이 지방세력에 시야를 돌릴 수 있는 여유가 마련되었다. 이에 따라, 왕권 신장의 일환으로 재지 이탈세력에 대한 직접 지배를 서두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왕족과 고관들을 지방의 거점에 분봉하는 담로제가 다시금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중앙 권력의 직접적인 지방 지배라는 것은 재지세력의 이해와 상충된 관계로 마찰이 야기되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동성왕이 남제에 보낸 국서에서 귀족에 대한 제수 명분으로 "나라의 환란을 물리쳐 제거하였다"와 "사직(社稷)의 튼튼한 울타리가 되었다" 에서 찾고 있음이 다시금 주목된다. 이 기록은 중앙 권력의 재지세력에 대한 무력을 수반한 일련의 재흡수 과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 저근이 면중왕(光州)에서 도한왕(高興)으로, 여고가 팔중후(羅州)로부터 아착왕으로 차제에 남하하고 있는 데서 지방 지배의 확대 과정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같은 백제의 재지세력 흡수는 급기야 동성왕 20년에 영외(領外) 세력인 탐라가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은 것을 이유로 무진주까지 친정하여 마지막으로 세력권에 편제시킴에 따라 일단의 완결을 보고 있다. 무력을 수반한 동성왕의 이같은 탐라친정에서 백제의 지방지배 방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지방세력의 재흡수는 동성왕 17년에 북위에 대한 전쟁에서 군공을 이유로 남제에 제수를 요청하기에 앞서 저간의 국내 사정을 간략하게 언급함에서 살펴진다.
그 내용은 대략 "송구스럽게도 부절(符節)과 부월(斧鉞)을 지니게 되어 열벽을 물리칠 수 있었다"라는 사실과 함께, "지난 번(동성왕 12년)에 저근 등이 영광스럽게 제수를 받아 신(臣)과 백성 모두가 안태(安泰)하다"라는 것이다. 중국적인 권위를 빌어 재지 세력을 흡수하는데 있어서의 국내적인 효과를 언급하고 있다. 동시에 같은 <남제서>에서 ‘부절과 부월을 지니게 되어 열벽을 물리칠 수 있었다’라고 한 것을 보아, 적어도 동성왕 17년 쯤에 이르러서는 지방지배가 거의 매듭지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여기서 ‘열벽’은 ‘열후(列侯)’를 의미하기 때문에, 토착 호족을 가리킴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