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三國時代)로 불리는 고대사회가 성립되기 이전에 이들 지역에는 각지에 크고 작은 소국(小國)들이 존재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라고 부르며,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대략 300년 경까지 해당된다. 우리나라에서 원삼국시대는 선사시대(先史時代)에서 진정한 의미의 역사시대(歷史時代)로 전환되어 가는 과도기적인 시기로서 역사학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삼국지>나 <후한서> 등의 중국 문헌에 따르면, 원삼국시대 경기 이남지역에서는 마한(馬韓) 54국, 진한(辰韓) 12국, 변한(弁韓) 12국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마한 54국은 오늘날의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지역에, 진한 12국은 경상도의 낙동강 동쪽, 변한 12국은 경상도의 낙동강 서쪽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그 가운데, 제일 큰 세력은 마한인데, 큰 나라는 1만여 가( ), 작은 나라는 수천 가( )로 이루어졌으며, 합하면 10여만 호(戶)였다. 진한과 변한은 큰 나라가 4~5천 가, 작은 나라가 6~7백 가가 되었으며, 합하면 모두 4~5만여 호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소국들 가운데 그 위치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원삼국시대에는 청동기의 실용성이 소멸되고, 철기생산이 본격화되면서, 각종 농·공구류가 철제로 만들어져 농업생산력의 향상을 가져왔다. 또한, 토기제작에 있어서 회전판의 사용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 졌으며, 밀폐된 가마의 사용으로 높은 온도에서 굽게 되어 전보다 훨씬 단단한 토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농경 특히, 벼농사의 발전으로 인한 농업생산력의 향상을 가져왔으며, 그로 인해, 인구의 증가와 계급의 분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등 급격한 사회변화가 이루어졌다.
농업의 발달로 기풍제와 추수감사제가 행하여졌는데(부여의 영고, 고구려 동맹, 동예의 무천), 이러한 종교적 의식에는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연일 음식과 술, 노래와 춤을 즐겼다고 한다. 종교적 제의(祭儀)를 주관한 제사장은 ‘천군(天君)’으로 불렸으며, 별도의 영역인 소도(蘇塗)를 관할하였는데, 죄인이 이곳에 도망가도 잡아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는 전문적인 제사장의 출현과 제정(祭政)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영혼의 불멸을 믿고 장례를 후하게 지냈는데, 가장(家長)이나 왕위(王位)가 부자상속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조상에 대한 제사의례도 발전하였다.
원삼국시대의 사회상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법률을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고조선의 경우 8조목의 법조문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살인과 상해, 절도를 금하는 3조목이 전해지고 있으며, 부여의 경우 간음을 금하고, 투기가 심한 부인을 사형에 처하는 등의 법이 있었다. 이를 통해, 원삼국시대에는 살인·상해·절도·간음·투기 등을 금하는 법률이 제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원삼국사회는 철제 농공구의 발달과 농업의 발달 등을 통한 경제력의 성장을 기반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그에 따라 정치구조가 점차 확립되어 갔다.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변화는 공주지역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곳곳에 많은 읍락들이 형성되어 갔을 것이다.
백제가 도성을 웅진성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웅진성은 중요한 기능을 수해하고 있었다. 당시 백제는 전국을 5방으로 구획하였다. 5방에는 그 거점인 방성(方城)을 각각 설치해 두었다.
5방성은 중방 고사성(古沙城), 동방 득안성(得安城), 남방 구지하성(久知下城), 서방 도선성(刀先城), 북방 웅진성이었다. 북방의 통치 거점인 웅진성은 왕도인 사비성에서 동북 60리 떨어져 있는데, 성벽 한 변의 길이가 1리반(一里半)이었다.
이러한 웅진성의 규모는 남방의 구지하성이 130보이며, 서방의 도선성이 200보인 것과 비교해 볼 때, 월등히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사비도읍기에도 이전의 왕도였던 웅진성의 비중이 실로 컸음을 뜻한다. 웅진성에 주둔한 병력은 그 규모에 비추어 볼 때, 여느 방성의 7백 명 보다는 규모가 큰 1천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북방의 웅진성에는 달솔 관등의 방령(方領)이 파견되어 있었는데, 그 밑의 방좌(方佐)가 방령을 보좌하고 있었다. 웅진성을 축으로 한 북방에는 10여개의 군(郡)이 소재하고 있었는데, 군의 우두머리인 군장(郡將)은 덕솔 관등의 3인을 배속시켰다.
660년 7월 신라와 당나라 군대의 동맹군은 백제 공격에 나섰다.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에 임명된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은, 13만 대병을 이끌고 산동반도를 출발하여 인천 앞 바다에 소재한 덕물도(德勿島: 덕적도)에 정박하였다. 동시에 신라측에서는 김유신이 5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백제 동부전선을 돌파하고 있었다. 백제 조정에서는 방어대책 수립에 나섰지만 의견 통일이 되지 않았다.
과단성 있기로 정평이 난 의자왕이었지만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의자왕은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전라남도 장흥)에 귀양 가 있는 좌평 흥수(興首)에게 사자를 보내어 물어 보았다. 흥수는 백강과 탄현(炭峴)을 방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 제안의 채택 여부를 둘러싸고 백제 조정이 격론을 벌이는 가운데, 당나라와 신라 군대는 빠른 속도로 이곳을 모두 돌파하고 있었다. 또, 신라군은 황산전투에서 계백 장군의 결사대를 무찔렀고, 당군 또한 금강 하구에 상륙하여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비성에 이르렀다. 나당연합군의 진격을 막는 백제군의 숫자까지 합치자면, 20만 안팎의 대병력이 사비성 일원에서 격전을 치렀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금년 7월 10일 대당(大唐)의 소정방이 수군을 거느리고, 미자진(尾資津)에 집결하였다. 신라왕 춘추지(春秋智)는 병마를 거느리고, 노수리산(怒受利山)에 모였다. 백제를 협격하여 서로 싸운지 3일만에 우리 왕성(王城)이 함락되었다. 같은 달 13일 비로소 왕성이 격파되었다. 노수리산은 백제의 동쪽 국경이었다" 라고 하여 긴박한 상황의 흐름을 요령있게 적어 놓았다. 여기서 노수리산은 두 말할 나위없이 황산(黃山)을 가리킨다.
의자왕은 태자 효(孝)와 함께 북방의 웅진성으로 몸을 빼었다. 의자왕은 과거의 왕도였던 웅진성에서 전세의 반전을 기약하고자 했던 것이다. 의자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사비성을 굳게 지켰으나, 결국 항복하였다. 사비성이 함락된 날은 7월 13일이었다. 7월18일에는 웅진성으로 피신하였던 의자왕과 태자 효를 비롯하여, 여러 성들도 모두 항복하고 말았다. 소정방은 2개월이 채 안된 9월 3일에 회군하면서 의자왕을 비롯하여 왕족과 여타 귀족 그리고 주민들을 당의 수도인 장안으로 압송하였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은 백제 옛 땅을 통치할 구상을 세웠다. 당시, 백제는 5방 37군 200성의 행정조직에 76만 호의 인구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 숫치는 고구려 말기의 5부 176성에 인구가 69만 7천 호였던 것보다 많았다. 당은 백제 지역을 나누어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蓮) 덕안(德安)등 5개의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고, 그 밑에 주 현(州縣)을 예속시킨 후, 당은 백제 귀족들 가운데서 도독 자사 현령을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의 격렬한 저항을 고려해 볼 때, 과연 5도독부제가 기능을 발휘했는지는 지극히 의문시된다.
의자왕이 항복함에 따라, 지방의 장관들도 일제히 손을 들었다. 의자왕의 항복은 곧바로 나라의 멸망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당나라 군대의 철수를 전제로 한 조건부 항복이었다. 그랬기에 신라와 당나라 군대에 힘차게 대적하던 백제 군대는 일제히 항쟁을 멈추었던 것이다. 그런데 약속과는 달리 당나라 군대는 늙은 의자왕을 가두고 군사를 놓아 닥치는대로 노략질을 자행하였다. 게다가 신라와 당의 전승 축하연에서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잔을 치게 했다. 이 장면을 보고는 백제의 옛 신하들은 목이 메어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 결국 이러한 것들이 울분의 공감대를 형성하여 조국을 되찾는 부흥운동의 대열에 힘차게 나서게 한 요인이 되었다. 항복했을 때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은 마상의 김법민(후일의 문무왕)에게 침세례까지 받았다. 패전의 참혹한 현실은 백제 주민들에게 울분의 공감대를 조성시켜 주었다.
이 가운데 흑치상지는 당나라 군대의 노략질을 피해 흩어져 도망한 주민들을 불러 모아 임존성(충남 예산)에 들어갔다. 그런 지 불과 열흘이 못되어 임존성에 들어 온 주민 숫자가 3만명이나 되었다. 흑치상지의 부흥운동은 백제 주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임존성의 부흥운동의 시발지였다.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이 함락된 상황과 초기 부흥 운동의 전황을 왜 조정에 최초로 알린 승려 각종(覺從)의 다음과 같은 보고문에 잘 집약되어 있다.
금년 7월 신라가 힘을 믿고 세력을 만들어 이웃과 친하지 않고 당인(唐人)을 끌어들여 백제를 전복(顚覆)시켰습니다. 임금과 신하들은 모두 잡혔으며, 노략질로 인해 사람이고 짐승이고 간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혹본(或本)에는 금년 7월 10일, 대당(大唐) 소정방이 선사(船師)를 이끌고 미자진에서 진(陣)을 쳤다. 신라왕 춘추지(春秋智)는 병마(兵馬)를 이끌고 노수리산(怒受利山)에 진을 쳤다. 백제를 협격하여 서로 싸운지 3일만에 우리 왕성이 함락되었다. 같은 달 13일, 비로소 왕성이 격하되었다 노수리산은 백제의 동쪽 경계였다]. 이에, 서부 은솔 귀실복신(鬼室福信)은 연혁히 발분하여 임사기산(任射岐山)에 웅거하였습니다[혹본에 북 임서리산(任敍利山)이라고 한다]. 달솔 여자진(餘自進)은 중부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에 웅거하였습니다[혹본에서는 도도기류산(都都岐留山)이라고 한다]. 각각 1곳에 영(營)을 두고는 산졸(散卒)들을 당겨 모았습니다. 병기는 전번 싸움에서 모두 소모한 까닭에 몽둥이로 싸워 신라군을 격파하였습니다. 백제는 그 병기를 빼앗았습니다. 이제는 백제 병기가 번득이고 날카로와져 당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 복신 등이 드디어 같은 나라 사람들을 모아서 함께 왕성을 지켰습니다. 국인이 존경하여 ‘좌평 복신과 좌평 자진(自進)’이라 하였습니다. 오직, 복신이 신무(神武)한 계략을 내어 이미 망한 나라를 부흥시켰습니다(<일본서기>권 26, 제명 6년 9월 조).
위의 기사에는 부흥운동의 영웅 복신의 용맹무쌍한 모습이 유감없이 적혀 있다. 그가 부흥운동의 봉화를 처음 올린 곳이 임사기산으로 적혀 있는 임존성이었다. 또, 이곳은 흑치상지가 무려 3만명이나 되는 주민을 지휘했던 곳이다. 복신과 흑치상지가 부흥운동이라는 대장정의 기치를 하필 임존성에서 올린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임존성은 서부 출신으로 군장(郡將)이었던 흑치상지의 근거지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일단 성의 규모가 백제성으로 최대급에 속한다. 임존성은 지형적으로 볼 때 사방으로의 조망이 매우 좋거니와 이곳에서 사비성과 웅진성까지의 거리가 90리로서 동일하다. 그러므로 임존성이 함락된다면 공주와 부여가 똑같이 위협을 받게 되므로 백제 도성의 안전과 직결되는 요충지였다. 이러한 임존성의 규모와 전략적 가치는 당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공주나 부여를 직접 겨냥하여 위협할 수 있었다. 때문에 임존성은 부흥운동의 시발지이자 중요 거점으로서 역할을 한 것으로 보겠다.
임존성에서는 조국을 되찾기 위해 3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몰려 왔었다. 그들은 정규군이 아니요, 의분(義憤)으로 일어난 민초들이었기 때문에, 의병 운동의 시발지로 규정할 수 있다. 백제 부흥운동은 8월부터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부흥군 최초의 조직적인 전투는 남잠(南岑) 정현성(貞峴城) 등을 근거지로 하여 신라와 당나라 군대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또 좌평 정무(正武)가 이끄는 병력이 두시원악(豆尸原嶽:錦山 혹은 靑陽)에 주둔하면서, 신라 군대와 당나라 군대를 깨뜨리고 부흥운동에 합세하였다.
<유인원기공비문 >과 <일본서기>에 의하면, 복신은 임존성을 근거지로 하였으므로, 흑치상지와 함께 이곳에서 부흥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밖의 지역에서도 많은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부여자진은 중부 구마노리성 즉, 웅진성을 근거지로 하여 궐기하였다. 승려인 도침(道琛)은 주류성(周留城)에서 일어났다. 이같은 부흥운동은 초기에는 구심도 없이 산발적으로 일어 났으나, 가장 정비되고 많은 병력을 장악하고 있던 복신과 도침을 중심으로 점차 통합되어 갔다.
부흥군의 최우선 공격 목표는 당나라 군대의 축출에 두었다. 부흥군은 당군이 주둔하고 있는 사비성에 대한 공격을 집요하게 재차 준비하였다. 661년 2월 복신과 도침이 지휘하는 부흥군은 사비성을 공격했다. 함락의 기로에 선 사비성을 구원하기 위해 당나라 본국에서는 웅진도독으로 부임한 직후인 660년 9월에 충청북도 보은의 삼년산성(三年山城)에서 급사(急死)한 왕무도(王文度)를 대신하여 유인궤(劉仁軌)를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史)에 임명해서 파견하였다. 유인궤는 선박을 이용하여 서해를 가로질러 금강으로 들어오려고 했지만, 복신은 웅진강으로 표기된 금강 하구에 2개의 목책을 세우고 막았다.
그리고 도침은 사비성을 포위하여 유인궤의 군대와 사비성 안의 군대가 합세하는 것을 차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비성 바깥 유인궤의 당나라 군대와 신라 군대가 합세하여 들이쳤으므로 부흥군은 퇴각하여 목책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금강을 방어선으로 하여 막았는데, 다리의 폭이 비좁은 관계로 떨어져 빠지고, 싸워 죽은 자가 1만여 명에 이르렀을 정도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복신과 도침은 사비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와 임존성으로 들어갔다. 신라군 또한 군량이 다하고 아무런 성과도 없었으므로 회군하고 말았다.
이러한 웅진도독부의 소재지를 살펴본다. <삼국사기>에는 661년에 부흥군이 ‘도성(都城)’에서 유인원의 당군을 포위했다고 하였다. 이와 동일한 기사의 ‘도성’을 <자치통감>에서는 ‘부성(府城)’이라고 했다. 따라서 도성 곧 사비도성이 웅진도독부성임을 알 수 있다. 웅진도독부는 당초 사비성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664년에 부흥군이 사비산성에 웅거하여 봉기하자 웅진도독이 군대를 징발해서 이들을 격파했다고 한다. 이는 664년에 웅진도독부가 사비성이 아닌 웅진성에 소재하였음을 알려준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웅진도독인 유인원은 유인궤와 함께 웅진성에 주둔하였다고 한다. 유인궤는 661년 9월 이후에 백제 땅으로 부임해 왔으므로, 그 이후 어느 때 웅진도독부를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 웅진성은 방어하기에 지리적으로 적합한 지역이었으므로 부흥군의 공격에 보다 용이하게 대처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부흥군의 군세는 매우 강성하였기에 가히 위협적이었다. <답설인귀서>에 의하면, 웅진도독부성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 1천명이 부흥군을 공격하다가 도리어 대패하여 단 한 사람도 살아 돌아가지 못할 정도였다. 그 이래로 웅진도독부성에 주둔하고 있는 당군은, 신라에 끊임없이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렇지만 신라에서는 역병(疫病)이 크게 돌아 병마 징발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또, 661년 3월 5일에 부흥군은 두량윤성 남쪽에서 진영할 곳을 살피고 있던 신라 군대를 급습하여 궤패시켰다. 그리고 부흥군은 고사비성(古沙比城) 밖에 주둔하다가 한달 엿새에 걸친 신라군의 두량윤성 공격을 물리쳤다.
부흥군은 당군이 주둔하고 있는 웅진도독부성에 대한 포위를 결코 늦추지 않았다. 부흥군은 웅진도독부성을 에워싸는 한편 웅진으로 통하는 도로를 모두 차단시켰다. 그럼에 따라 웅진도독부성 내에서는 염시(鹽 )가 결핍되어 쩔쩔매는 형편이었다. 신라측에서 겨우 강건한 정예 병력을 뽑아 몰래 소금을 보내어 구하였을 정도로 곤경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신라는 평양의 당군에 대한 보급도 맡고 있었으므로, 웅진도독부성에 대한 부흥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지극히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답설인귀서>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당시 신라측의 곤혹스러운 모습을 잘 전해준다.
11월에 이르러, 웅진의 군량이 다하였다. 먼저 (군량을) 웅진에 보내면 칙지(勅旨)에 위반할 우려가 있고, 만일 평양에 (군량을) 보내면 웅진의 군량이 곧 떨어질 우려가 있었다. 그런 까닭에 노약자를 시켜 웅진에 군량을 운송하고, 강건한 정예 병사를 시켜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웅진에 군량을 보낼 때에는 노상에서 눈을 만나 사람과 말이 다 죽어 백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하였다.(<삼국사기>권 7, 무주왕 11년)
부흥군과 신라군의 전투는 사비성 주변인 지금의 충청남도 지역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부흥운동에 가담한 곳이 바로 이들 지역이었고, 또 주요 공격 대상인 사비성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661년 후반부터 부흥운동은 신라군의 거센 공격을 받아 현저하게 쇠퇴하였다. 661년 9월 25일에는 부흥군이 점령하고 있던 전략적 요충지인 옹산성(甕山城)은, 신라군 주력 부대의 공격을 받아 불과 이틀만에 수천명의 희생자를 내고 함락되었다.
신라는 옹산성을 점령한 후에야 웅현(熊峴)에 성을 쌓고 당군이 주둔하고 있는 웅진도독부성에 이르는 도로를 겨우 개통할 수 있었다. 부흥군은 곧이어 신라군의 공격이 우술성(雨述城)으로 옮겨옴에 따라, 1천여 명의 희생자를 내고, 성을 함락 당했다. 이 때 달솔 조복(助腹)과 은솔 파가(波伽)는 무리를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이들은 신라측으로부터 관등과 관직을 받을 정도로 선무공작 차원에서 우대를 받았다. 이 후 전쟁은 신라측에서 승기를 잡았으며, 부흥운동은 완전히 수세로 몰렸다. 662년 3월 문무왕이 죄수를 크게 사면하는 한편,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소사(所司)에게 명하여 큰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라고 했다. 이 사실은 일단 부흥운동이 크게 위축되었던 바, 더 이상 위협의 대상이 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실제, 신라가 옹산성과 우술성을 함락시킨 661년말~662년 초반에 걸쳐 고구려와의 전투에 주력할 수 있었던 것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부흥군의 공격은 전면 중단되지는 않았다. 내사지성(內斯只城:대전시 유성구)의 주변 지역을 산발적으로 공격하다가 진압된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662년 7월 부흥군은 웅진도독부성과 신라와의 통로를 끊어 군량수송을 차단시킬 목적으로 금강 동쪽에 포진하여 있었다. 그런데 복신은 금강 동쪽에서 활로를 트기 위한 유인원·유인궤가 이끄는 당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크게 패하였다. 부흥군은 요새성인 지라성(支羅城:대덕군 진잠면)과 윤성(尹城:청양군 정산) 그리고 대산(大山) 및 사정(沙井:대전 동쪽) 등의 책(柵)을 빼앗겼거니와 상당한 인적 손실을 입었다. 그럼에 따라 복신은 강에 바짝 닿아 있는데다 높고 험준하며,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는 진현성(眞峴城)에 군대를 증원시켜 지켰다. 유인궤는 신라 군대를 이끌고 야음을 틈타 성밑에 바짝 다가가서는 사면에서 성가퀴를 잡고 기어올라 왔다. 부흥군은 방비를 소홀히 하고 있다가 기습공격을 받았다. 날이 밝을 무렵, 8백 명의 희생자를 내고 진현성은 함락되었다. 이로써 한동안 두절되었던 웅진도독부성과 신라의 군량 소송로가 다시금 개통되었다. 3년을 이끌었던 백제부흥운동은 663년 8월 백강전투에서 부흥군이 신라와 당나라 군대에 참패함에 따라,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백제 부흥운동의 종식은 그 유민들에게 유형무형의 엄청난 채무를 안겨주었다. 국가재건의 열망과 환희는 깊이 묻혀 버렸고, 백제 향촌 사회의 기반은 송두리째 파괴된 처참한 상황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전쟁 끝이 되어 즐비하던 가옥은 황폐하고 시체는 초분(草奔)과 같았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폐허로부터의 출발과 새로운 질서의 모색이 필요되었다. 백제 옛 땅을 관할하던 당나라 장군 유인궤는 "해골을 묻고 호구를 적(籍)에 올리고, 촌락을 다스리며 우두머리를 두고 도로를 통하게 하고, 교량을 놓으며 제언(堤堰)을 보수하고, 파당(坡塘)을 복구하며 농상(農桑)을 과하고, 가난한 자를 먹이며 고아와 노인을 양육하고, 당나라의 사직(社稷)을 세우고 정삭(正朔)과 묘휘(廟諱)를 반포하니 백성이 모두 기뻐하고, 각기 제자리에 안주하게 되었다."라고 했을 정도로 어느 정도의 성과를 올렸다.
당은 백제 옛 땅에 대한 정비와 수습이 이루어짐에 따라, 통치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을 구현해 나가고자 하였다. 이러한 선상에서 664년 벽두에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을 비롯하여 옛 백제 관료들 또한 대거 환국하게 되었다. 당은 백제 옛 땅을 신라에 넘겨주기로 한 동맹결성 초기의 약속과는 달리 그 직접적인 지배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당은 3년간의 걸친 부흥운동을 통하여 무력적 지배의 한계를 절감하던 터이었다. 그런 만큼 과거의 백제 왕실이 지닌 권위와 후광을 빌어서 그 유민들을 수습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였다. 표면적으로는 백제 재건사업에 힘쓰는 것처럼 하면서, ‘백제‘로써 당분간 신라를 견제하게 하는 동안, 고구려와의 전쟁에 주력할 계획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연후에 당은 백제 옛 땅을 교두보로 하여 삼국을 모두 병탄할 구상을 하였기에 당은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도독에 임명하였다. 당은 백제 옛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차하고,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았던 바, 양자는 형식상 동격이 되는 것이다.
당은 664년 2월 유인원이 주재한 가운데 웅령(熊嶺)에서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金仁問) 간에 서맹(誓盟)을 성사시켰다. 이 서맹의 성격은 웅진도독으로 삼아 백제 옛 땅에 귀국시킨 부여융의 정권과 신라와의 묵은 감정을 풀게 하고 흩어진 백제 유민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데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 달인 3월에 "백제 잔중(殘衆)이 사비산성에서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웅주(진)도독이 군사를 내어 공파하였다"라든지, 7월에 부흥군이 고구려의 한 성곽을 공격하자 웅진부성(熊津府城)의 군대가 징발되고 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부여융 정권은 백제 땅에 둥지를 틀지도 못하였고, 웅령서맹이 실패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여하간 취약한 상황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665년 8월 공주의 금강 북편에 솟은 취리산(就利山)이라는 야트막한 산에서 유인원을 중심에 두고, 그 좌우편에 부여융과 문무왕이 백마를 잡아 그 피를 각자의 입술에 적시는 삽혈( 血)이라는 장중한 의식을 치렀다. 이 때 부여융과 문무왕간의 서맹문은 한 고조(漢高祖)의 고사(故事)를 의식해서 철판에 글자를 새기어 금으로 칠한 후 신라의 종묘(宗廟)에 보장(保藏)하게 하였다.
당은 이 때 백제의 옛 땅의 동반부에 대한 통치권을 신라에 위임하여 당장의 반발을 막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당은 서반부에는 탁상구획에 그친 기존의 5도독부제를 고쳐 웅진도독부를 중심으로 그 관하에 7주(州) 51현(縣)을 설치하였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백제 옛 땅에 대한 당의 통치기구가 웅진도독부였다. 부여융을 도독으로 한 웅진도독부는 백제 멸망 당시 당으로 압송되었던 백제 귀족들을 귀환시켜 그 요직을 구성하였다. 웅진도독부는 비록 괴뢰 정권에 불과하지만, 성격을 달리하는 백제 부흥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부흥운동을 주도하다가 당에 투항했던 흑치상지는 664년 경에 ‘웅진성대(熊津城大)‘ 즉, 웅진성주에 임명되었다. <자치통감>진기(晋紀) 함화(咸和) 9년 2월조의 주석에 의하면, "성대는 성주와 같다. 일개 성의 우두머리인 까닭에 성대라고 한다"라고 하여 보인다. 그가 웅진성주로 발탁된 요인은 ‘인망(人望)‘에 있었다고 한다. 흑치상지가 발탁되자, "사중(士衆)이 기뻐한 바가 되었다"라고 한다. 이는 흑치상지의 인품을 치송하는 문구이기는 하지만 당의 옛 백제 땅에 대한 지배시책과 더불어 웅진도독부의 성격을 시사해 준다. 즉, 당은 옛 백제 지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백제 유민들로부터 신망을 받는 옛 백제 관료들을 선발하여 전면에 내세웠음을 알 수 있다. 흑치상지는 ‘기충도위 진웅진성대(圻衝都尉 鎭熊津城大)‘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흑치상지의 직무를 정확히 살피기는 어렵지만, 웅진도독부의 치소였던 웅진성을 책임지는 데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웅진도독부에 속한 동명주(東明州) 관하의 4개 현 가운데는 웅진현(熊津縣)이 있었다. 흑치상지는 웅진현의 현령이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가 설령 명목상이더라도 당고종의 회유를 받아 투항하였을 정도이거니와, 부흥운동을 마무리 짓는 데 기여가 없지 않았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그는 현령보다는 고위직에 임명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그는 지금의 공주 지역으로 비정되기도 하는 동명주의 장관인 자사였을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다. 한편, 흑치상지의 부흥운동 거점이었던 임존성은 지심주(支 州)의 주현이었던 지심현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흑치상지를 자신의 연고지에 파견하지 않은 것은 그에게만 국한된 이례적인 일로 보기는 어렵다. 대체로 이같은 입장에서 웅진도독부의 관인 임명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웅진도독부의 관인으로서 복무하게 된 흑치상지는, 672년 ‘충무장군 행대방주장사(忠武將軍行帶方州長史)‘가 되어 지금의 나주 다시(多侍)를 거점으로 한 나주 함평지역에 파견되었다. 그는 이 후, ‘사지절 사반주제군사(使持節沙泮州諸軍事‘. ‘사반주자사(沙泮州刺史)‘를 거쳐 상주국(上柱國)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직책은 신라의 공격으로 웅진도독부가 해체되는 상황에서 받은 것이므로 실질적인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흑치상지는 그 후, 다시금 ‘좌영군장군 겸 웅진도독부사마(左領軍將軍兼熊津都督府司馬)‘로 전봉(轉封)되었고 ‘부양군 개국공‘과 식읍 2천호에 봉해졌다. 여기서 ‘웅진도독부 사마‘는 흑치상지가 당으로 들어간 이후 받은 명목상의 백제 관직으로 판단된다. 그렇더라도, 그는 웅진도독부의 실질적인 수반으로서 ‘우융위낭장 상주국(右戎尉郎將上柱國)‘을 제수받은 이군이 670년 신라에 억류되고 671년 웅진도독부가 소멸되는 시점에서, 그 뒷수습을 책임졌던 공을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흑치상지가 함형(咸亨) 3년(672)에 대방주장사에 임명되었고, 또 사반주자사로 전봉된 점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신라의 옛 백제 지역에 대한 지배를 뜻하는 소부리주(所夫里州)의 설치 시기를, 과거에는 671년으로 간주하여 왔었다. 그러나 672년이 타당함을 입증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671년에 부여에 소부리주가 설치되어 웅진도독부가 해체되었다면, 672년에 흑치상지가 대방주장사와 사반주자사를 역임할 수는 없다. 단, 이는 671년에 웅진도독부는 해체되었지만 그 잔존 세력들이 대방주와 사반주 구역인 나주 함평과 전라북도 동부 일원으로 밀려 내려가면서 계속 저항했던 실례를 말해주는 지도 모른다. 이러한 추정은 웅진성주였던 흑치상지가 672년에는 돌연 전라남도 해안 지역에서 활약한 점에서 뒷받침되지 않을까 한다. 어쨌든 웅진도독부를 축으로 하는 백제 정권의 마지막 그림자는 672년에 걷히게 되었음은 분명하다.
웅진도독부를 소멸시킨 신라가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한 시기는 <삼국사기>문무왕 11년 조 7월의 <답설인귀서>와 그 9월조의 기사 중간에 다음과 같은 짤막한 기사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소부리주를 두고 아찬 진왕(眞王)으로 도독(都督)을 삼았다.
두 기사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 선뜻 취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삼국사기>문무왕 11년 조의 소부리주 설치 기사에 이은 9월 조의 당나라 군대가 지금의 황해도 방면인 대방(帶方) 지역을 침공한 기사를, 이듬해인 문무왕 12년 7,8월조 기사의 강령(綱領)으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소부리주 설치 기사 역시 문무왕 12년조에 해당될 개연성이 높다. 신라 통치구역으로서의 소부리주 설치가 백제 옛 땅의 완점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때, 문무왕 12년(672) 초까지도 웅진도독부의 잔여세력이 항전한 사실은, 그 설치가 적어도 문무왕 11년은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게 소부리주의 주치(州治)인 사비성이 신라에 공취된 시기가 문무왕 12년이라는 사실이 있다. <삼국사기> ‘문무왕 12년조‘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정월에 왕이 장수를 보내어 백제의 고성성(古省城)을 쳐 이기고 2월에는 백제의 가림성(加林城)을 쳤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 기사에 보이는 고성성의 소재 파악이 중요한 문제이다. <삼국유사> ‘남부여전 백제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그 지명은 소부리라 하였다. 사비(泗 )는 지금의 고성진(古省津)이다.
위의 기사로 미루어 소부리주의 설치는 문무왕 11년(671) 7,8월의 사실로 간주하였다. 종래, 이 기사를 의심없이 취한 바 있으나,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본기(本紀)와는 달리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신라의 소부리주 설치시기를 다음과 같이 문무왕 12년의 사실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여는 본시 백제의 소부리군으로 문무왕 12년에 총관(摠管)을 두고 경덕왕 때 부여군으로
고쳤다.
(<삼국사기> 권 36, 지리3)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부여군 산천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성진(古省津)은 사비하(泗 河) 부소산(扶蘇山) 밑에 있다.
위와 같이 볼 때, 고성진과 고성성은 서로 관련있는 지명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성성은 부소산성 곧 사비산성의 별칭이든지 아니면 백마강변에 소재한 성이라고 보겠다. 요컨대 고성성이 현재의 부여에 소재한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부여 지역이 신라에 점령된 시기는 문무왕 12년이므로, 자연 소부리주의 설치시기는 문무왕 12년(672)이 타당하다고 보겠다. 신라가 공주를 비롯한 백제 옛 땅을 완전하게 점유한 시기는 672년이었다. 공주 땅은 이제 신라의 역사 무대로 넘어 가게 된 것이다.